Films and TV

Ex Machina — 기계, 자연의 새로운 일부

Transcendence — 우리는 진화할 준비가 되었을까’와 같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같은 매체에 싣고자 작성하였으나 해당 매체와 뜻에 차이가 있어 여기, Transpunk blog에만 게시합니다.

2014년은 인공지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언급된 해였습니다. 여러 유명 전문가들이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위협이라 발언하고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진은 100년을 바라보는 대규모 과제인 ‘AI100’에 착수했습니다.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등장해 인간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으니, 이 시기가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소식들 중 기계가 처음으로 튜링 테스트(Turing test)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튜링 테스트는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지 판별하는 시험입니다. 이 용어는 인공지능 분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앨런 튜링(Alan Turing) 박사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습니다. 튜링 박사가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지 고려하기 위해 고안한 ‘흉내내기 게임(imitation game)’을 바탕으로 훗날 연구자들이 인간인 심판이 다른 방의 피실험자와 대화하여 상대가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판단하는 실험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튜링 테스트입니다. 몇 년 전부터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삶과 죽음을 겪은 앨런 튜링을 제대로 대우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더니 최근에는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주인공이 튜링 테스트에 참여하는 것을 전체적 내용으로 하는 영화도 등장했군요. 제목은 ‘엑스 마키나(Ex Machina)’. 기계장치에서 온 신이라는 뜻의 라틴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표현에서 온 제목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본래 극 따위에서 뜬금없는 사건이나 존재를 등장시켜 개연성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인조인간이 소재인 이 영화에서는 어휘 자체가 가지는 뜻을 먼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난 가을에 소개한 ‘트랜센던스’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고 흥미로운 미술, 성경, 신화적 상징들을 갖춘 스릴러물입니다.

유명한 인터넷 검색엔진 회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케일럽(Caleb)은 사내 추첨으로 회사의 CEO인 네이선(Nathan)과 함께 그의 산장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네이선의 산장은 방문자를 압도하는 크기의 사유지에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인데, 네이선은 이곳에서 인공지능을 갖춘 인조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네이선은 케일럽에게 자신이 만든 에이버(Ava)에 대한 튜링 테스트의 심판이 되어 달라 합니다. 케일럽은 이에 응하는데 이 실험은 피실험자가 기계임이 밝혀진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엄밀하게 볼 때에는 튜링 테스트가 아니지요. 네이선은 에이버가 자의식을 가졌는지 판단하는 것이 실험의 목표라 설명합니다. 트랜센던스의 학자들과 같이 자각능력을, 인공지능을 인간지능과 대등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주된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낯설고 갇힌 공간에 며칠간 머문다는 설정은 기대와 긴장감을 주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주인공의 평범함은 관객을 스크린으로 쉽게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에이버는 인간과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그래서 신비롭게 매력적이며 관객의 호감을 삽니다. 인간형인 에이버의 아름다운 외모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관해 그것이 가질 몸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까’, ‘농담을 할 수 있을까’ 정도를 궁금해 하지만, 인간과 비슷한 몸을 가진 인공지능 존재를 마주하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까지 실감나게 고민하게 됩니다. 네이선은 케일럽에게 적극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에이버가 너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까?” 또한 이렇게도 묻습니다: “너는 에이버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어?” “에이버가 숨은 의도를 가지고 너를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네이선은 에이버의 인간성 시험에 감정과 자율성을 포함합니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과연 감정과 감정의 흉내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있느냐는 질문으로 치환됩니다. 저는 지적 존재가 가지는 모든 의지는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존재들은 이 본능을 만족시키는 사건이나 존재에 대해서는 계속 그것이 일어나거나 유지되도록 하고자 하고 이 본능에 위협적인 것에 대해서는 저지하거나 없애려고 하는데, 이것이 행동을 계획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굶고 있는 제게 음식을 준다면 그는 제게 이로운 행동을 하였으므로 저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계속 음식을 얻을 방법을 생각할 것입니다. 동물은 자기를 공격하는 동물에게 위협적으로 보이고자 몸을 부풀리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이 자연스레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므로 감정반응이 즉각적인 듯 여겨지는 것이지 지적인 계산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인공적 존재들에게 지능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입니다. 에이버는 그럴 듯하게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에이버는 자신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폐기될 것을 예상하고 분노합니다. 인간은 시험에 실패한다고 폐기당하지 않는데 자신은 폐기당하는 것을 부당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있도록 한 네이선에게 ‘미워한다’고 표현합니다. 자기 존재의 위협에 분노와 미움을 가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에이버는 네이선이나 케일럽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지능을 잘 활용합니다. 에이버는 위협을 극복할 계획을 세우고 수행합니다. 네이선의 말대로 에이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었고, 스티븐 호킹 박사와 일론 머스크가 말한 것과 같이 인간보다 똑똑하고 강해져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가졌지만 대부분의 인간들과 달리 자신 뿐 아니라 남의 감정까지 냉정하고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으며 감정을 능숙하게 가장할 수도 있는 에이버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네이선이 에이버를 인격체로 대우하여 폐기 위협을 주거나 가두지 말아야 했을까요? 친구가 필요하면 나의 친구로 역할이 제한된 로봇을 만들고, 자식을 기르고 싶으면 아기 로봇을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 봅시다. 친구 로봇이 나를 싫어하면 폐기하고, 아기 로봇이 마음에 들지 않게 자라면 이웃에 팔고, 위험한 경찰 임무에는 로봇부터 내보내도 되는 걸까요? 인간 수준의 동반자로 만들어진 이들에 대해 인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적, 신체적으로 인간보다 강해진 이들이 인간 세상의 질서에서 발생하는 욕망을 추구하며 사회에서 인간들의 위에 설 것이 두려워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과연 초월적으로 똑똑한 존재가 그런 욕망을 가질까요? 인간들이 이 시대에 가지는 욕망들은 바람직한 것들인가요? 인간을 닮은 로봇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까지 함부로 대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조차 차별이 존재하는 구조를, 인간보다 똑똑한 로봇들은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 수준 이상의 지능을 가진 기계가 갑작스레 내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기술 발전을 경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고민을 미루는 것은 그 두려움을 현실화할 것입니다. 무섭지 않은 미래를 바란다면, 자연의 새 식구인 기계에서 올 것들을 기다리는 동안 인간 지능, 그 외의 지능, 생태계 등 자연에서 이미 온 것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Ava entering the world Ava in th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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